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 (문단 편집) === 이제 신동이기에 늦은 나이 === 아버지가 1945년에 사망하였다. 아버지는 영화음악에 매진한 코른골트를 보면서 '진정한 클래식 음악'을 작곡하지 않는 것을 보고 매우 안타까워 했다. 코른골트는 영화음악만 작곡하는 자신을 보고 작곡가로서의 위기감을 느꼈다. 이때 영화사에서 "에리히, 당신이 처음 우리에게 왔을 때에는 흥미진진하고 쾌활하고 폭발적이었는데 당신의 음악은 지금은 그때와 같지는 않네요."라고 말했는데 코른골트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대사를 이해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이해하기 되었거든."이라고 말하였다. 이제 본격적으로 '클래식' 음악을 작곡할 것을 결심한 코른골트는 1945년에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를, 다음 해인 1946년에 첼로협주곡 C장조를 작곡하였다. 1949년에 오스트리아로 돌아와 자기 작품을 지휘하였지만, 12음 기법이 점령한 빈에서는 별 반응도 없었고 냉담한 반응만 받았다.[* 이 때는 진정으로 12음 기법이 젊은 작곡가들 사이에서 신고전주의를 몰아내고 '완승'을 거둔 상태였고, 따라서 후기 낭만주의적 작품은 물론 조성이 나타나는 작품이라면 발을 붙일 수조차 없었다.] 게다가 영화음악에 매진했다는 이유로 '영화음악 작곡가'라고 일단락되어버린 코른골트는 더 이상 진지한 작곡가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코른골트의 순음악에 대한 열정은 계속되었다. 마지막까지 '클래식' 작곡가로 남길 원했던 코른골트는 1952년에는 교향곡 Op.40, 1953년에는 관현악을 위한 주제와 변주곡 Op.42를 작곡하였다. 이러한 작품들은 유수의 관현악단들에 의해 연주되기는 하였으나, 신진 작곡가들이 주도하는 현대음악계에는 거의 어떤 이슈거리도 되지 않았다. 그 사이 코른골트의 생명은 꺼져가고 있었다. 1956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코른골트는 장시간 투병 끝에 그 이듬해에 사망하였다. 영화음악 작곡가이자 클래식 작곡가로서의 인생을 마감한 것이다. 코른골트의 부인 루이제 코른골트는 "나와 에리히의 우정은 시작된 순간부터 이 영원한 친구를 잃은 마지막 순간까지, 내 인생은 한 편의 길고 행복한 러브스토리였다."라고 회상하였다. 오페라하우스에서 조기를 거는 것을 본 루이제는, 그간 진지하게 조명받지 못한 남편의 생을 떠올려서였는지 "조금 늦었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5년 뒤에 루이제 코른골트도 사망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